이안이 게이 카우보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 프루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괜히 킥킥 웃음이 나왔던 걸 기억합니다. 게이 카우보이라니, 너무 뻔한 설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이렇습니다. 카우보이란 이성애자 미국 남성의 궁극적인 상징입니다. 하지만 전에도 제가 몇 번 말했지만, 극단적인 이성애 이미지는 대부분의 경우 동성애적인 이미지로 연결되지요. 따라서 누군가가 게이와 카우보이라는 단어를 연결했다면 그 동기는 너무나도 계산하기 쉽습니다. 반쯤은 자연스러운 동성애 이미지를 즐기고 반쯤은 그 어긋난 듯한 상황으로 관객들을 자극하는 드라마를 만들려는 거예요. 너무 뻔해서 시작부터 기성품적인 설정인 것입니다.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은 그 기성품 설정을 극복했을까요? 아뇨, 저에겐 여전히 이 영화가 미리 주어진 기성품 설정을 이용해 만든 기성품 영화처럼 보입니다. 주제나 이야기 모두가요.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처음 만난 젊은 에니스와 잭이 첫 섹스를 할 때까지 제가 계속 실실 쪼갰던 것도 그 때문이었죠. 카우보이 일을 통해 두 사람이 만나고, 곰 때문에 식량을 잃고... 이 모든 설정이 섹스신으로 이들을 몰고가기 위한 핑계인 건 너무나도 당연했으니 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이 기성품 설정들은 단점이 되지 않습니다. 이게 재미있는 거죠. 영화는 이 이야기가 세상에서 가장 뻔한 게이 로맨스이고 '게이 카우보이'라는 간단한 설정이 얼마나 쉽게 농담거리로 떨어질 수 있는 건지 전혀 모르는 것처럼 이들의 이야기를 진지하고 심각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그건 정말로 먹힙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진지한 영화입니다. 아마 이 주인공들이 대도시의 지식인들이었다면 결코 이런 진지함에 도달하지 못 했을 거예요.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에니스와 잭은 사정이 다릅니다. 자기네들이 빠진 상황의 진부함을 인식할만한 예민함이나 지성을 갖추고 있지 못하죠.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건 서로를 원한다는 것과 그걸 드러낸다면 끔찍한 결과가 닥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른 동네에서라면 거의 코미디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이 설정은 자기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도 못하는 이 우직한 남자들의 사이에서 진지한 드라마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게이 카우보이가 나오는 것이 조금 튈 뿐, <브로크백 마운틴>은 무척이나 고전적인 비극입니다. 사회적 편견과 두려움 때문에 행복을 놓치고 사랑을 잃은 회한에 찬 연인들의 이야기지요. 영화가 동성애와 호모포비아라는 단어를 채워넣은 빈칸에 다른 단어들을 대입하고 두 주인공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는 관객들도 많을 겁니다.
이안의 투명한 스타일은 이 영화에서 장점으로 기능합니다. 그는 감독으로서 자의식을 내세우는 대신 그들의 이야기를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합니다. 눈에 뜨이는 카메라워크도 없고 편집이 튀지도 않아요. 그 때문에 영화는 숨기는 것 없이 솔직해 보입니다. 모든 캐릭터들에게 공평한 스토리 전개 덕택에 조연들 역시 연기할 공간을 얻고요. 그 때문에 종종 아내 역의 배우들이 게이 카우보이 역 배우들보다 더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특히 에니스의 아내 알마를 연기한 미셸 윌리엄스는요. 남편의 비밀을 알아차린 알마가 말없이 그 충격을 받아들이는 장면 같은 걸 보세요. 배우에겐 굉장히 실속있는 역이었어요.
<브로크백 마운틴>은 지금까지 이안이 만든 영화들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를 이안의 대표작으로 뽑고 싶지는 않아요. 아마 이 영화는 이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감독했어도 특별히 다른 영화가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목적지가 분명히 정해진 영화였으니까요. (06/02/07)
기타등등
이안은 <센스 앤 센서빌리티> 때 양들과 씨름하다 지쳐 다시는 동물하고 영화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었죠. 그랬던 그가 이번엔 몇 천 마리의 양과 상대하더군요. 그 중 몇마리는 CG였던 모양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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