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빈전의 지밀궁녀 월령이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됩니다. 내의녀 천령은 살인이라 확신하지만 상부에서는 자살로 처리하고 슬쩍 묻어버리려 하죠. 주변 상황을 보면 당연하기도 한 것이, 궁중 내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전에게 몇 년 째 후사가 없는 동안 궁녀 출신의 희빈이 덜컥 아들을 낳아버렸거든요. 희빈은 어떻게든 얘를 원자로 만들어야겠는데, 마마보이인 왕은 아무런 힘이 없고 윗줄의 마나님들이 그걸 좋게 볼 리가 없습니다. 궁녀들 입장에서는 조금만 줄을 잘못 서도 남은 인생이 파탄날 판이죠. 다들 조용히 사는 게 좋은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분위기가 수상하다고 주인공 천령까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천령이 궁을 쑤시고 다니는 동안 궁 안은 시끄러워지고 가끔 사람들도 죽어나갑니다.
언젯적 일일까요? 패션이나 유행을 보아하니 정조 무렵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왕은 정조가 아닙니다. 그는 <음란서생>의 왕처럼 존재하지 않았던 18세기 왕이고 희빈이나 주변 인물들은 모두 허구입니다. 그래야 맞겠죠. 손쉬운 방법이긴 한데 최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사극이 매력적인 건 그것이 실제 역사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죠. 아무리 주인공이 허구의 인물이라도 말입니다.
하긴 <궁녀>에서 구체적인 실제 역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실제 역사가 아닙니다.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 조선 후기를 살았던 궁녀들의 생활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진짜 목표죠. 천령이 수사하는 살인사건도 이들의 삶을 엿보고 궁내의 권력관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 보여주기 위한 수단입니다. 후반부에 진상이 밝혀지긴 하지만 누가 범인이고 무엇이 동기였는지는 사실 덜 중요하죠. 범인이 누구건 수사과정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건 거의 비슷하니까요.
적당히 허구의 왕을 도입한 또다른 이유는, 이 영화가 <전설의 고향>파 귀신 영화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추리물이 3분의2라면 초자연적인 귀신이야기는 3분의1 정도 되지요. 이건 스포일러가 아닙니다. 초반부터 궁내에 초자연적인 힘이 감돌고 있다는 게 공공연하게 드러나거든요. 유감스럽게도 긴 머리 여자 귀신이 머리칼을 무기로 쓰는 장면도 한 몇 초 정도 나옵니다. (안 나와도 되었을 텐데. 그 장면은 그냥 그랬거든요.) 귀신 이야기가 추리물과 어울리냐고요? 어울리기도 하고 안 어울리기도 합니다. 전 그냥 추리물로 밀어붙였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서 정말로 무섭고 잔인한 건 귀신이 아니라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이 영화의 귀신이 작품의 고딕적인 음울함에 물리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건 사실입니다. 귀신의 존재가 지나치게 논리적인 건 탈이지만.
추리물로서 <궁녀>는 셜록 홈즈 이야기보다는 <형사 르콕>에 더 가깝습니다. 천령의 캐릭터 때문이지요. 천령은 머리도 좋고 재주도 밝지만 명탐정의 통찰력은 없습니다. 그냥 부지런하고 조금 눈치없는 노력파죠. 워낙 에너지가 넘치고 집요하기 때문에, 이 사람은 영화의 의도와 상관없이 좀 코믹하기까지 합니다. 그 때문에 진짜로 진지하기만 한 다른 캐릭터들과 따로 놀기도 하고요. 캐릭터의 깊이를 넣기 위해 부여한 과거사를 지워버리거나 축소하고 경험없는 성실한 노력파 탐정의 이미지만 강화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봐요. 그러면서 블랙 유머를 조금만 넣어주었다면 영화의 분위기가 훨씬 더 잘 통제되었을 겁니다. 지금은 과거사가 캐릭터의 발목을 잡고 의도하지 않은 코미디가 종종 신경질적인 웃음을 유발하거든요.
영화는 빠릅니다. 조금도 쉬지 않고 결말을 향해 착착 달려가지요. 좋은 거지만 종종 지나치게 빠르다는 생각도 듭니다. 관객들이 따라가지 못해서가 아니라 빠른 속도로 질주하다보니 작품이 호흡을 조절하지 못하는 거죠. 지금보다 한 10분 정도만 더 길었어도 이야기가 더 수월하게 흘렀을 겁니다. 지금은 시퀀스간의 연결이 튀는 부분도 많고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고 밀리는 부분들도 꽤 돼요. 전체적으로 좀 거칩니다.
영화는 빠른 만큼 가차없기도 합니다. 조금 지나치다는 생각도 들어요. 월령 같은 경우는 조금 더 깊이 그려질 수 있었고 그랬다면 영화도 더 나아졌을 테니까요. 하지만 영화는 쓸데없는 감상주의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처음부터 작정했습니다. 불필요한 변호 따위는 할 생각도 없습니다. 누군가가 죽으면 시체를 치워버리고 다음 단계로 나가는 거고요. 사람들 어투도 그래요. 사극의 느긋함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죠. 다들 말들이 짧습니다. 보통 사극에서는 "뭐뭐를 했느냐~~~"로 늘어질 법한 대사가 빠른 스타카토의 "뭐했어?"로 줄어듭니다. 지나치게 현대적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뭐, 요새 나오는 다른 사극들도 마찬가지잖아요.
배우들은 모두 자기 역할을 하는 편입니다. 예고편 때도 종종 지적되었던, 지나치게 입에 힘을 주는 박진희의 연기는 조금 거슬리지만 영화를 보면 주어진 캐릭터 내에서 자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보다 조연들의 연기가 더 좋습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배우는 차갑고 냉정한 감찰상궁으로 나온 김성령입니다. 벙어리 수방 궁녀 옥진을 연기한 임정은도 대사가 없다는 핸디캡을 좋은 기회로 삼고 있고요.
<궁녀>는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페이스 좋고 서스펜스 넘치고 재미있죠. 하지만 보는 내내 <왕의 남자>를 보았던 때와 비슷한 감상이 머리를 스칩니다. 아이디어 좋고 내용도 좋고 배우들도 좋은데, 왜 조금만 더 욕심을 내지 않았을까요? 그랬다면 진짜 끝내주는 영화가 되었을 텐데. (07/10/02)
기타등등
감독 김미정이 영화 후반부에 상궁으로 출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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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보기힘든 수작 호러물이 드디어 나왔군요 요 최근 사이 이런 분야에 영화만 나왔다하면 워낙 악평일색이여서 걱정을 했는데 아주 잘나왔다니 참 다행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