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얼리티로 잡아낸 아름답고 애절한 순간
뒤늦게 DVD로 나온 <초속 5센티미터>를 봤다. 이미 인터넷을 통해 공개된 <벚꽃 이야기>를 보았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는 대략 알고 있었다. 신카이 마코토의 전작 <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의 정서는 <초속 5센티미터>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인 초속 5센티미터를 제목으로 쓴 이번 애니메이션에서도, 신카이 마코토는 아련한 상실감을 황홀하게 그려낸다. 그는, 그녀는 헤어진 사람을 그리워하며 현실을 견디어낸다. 그들이 던지는 말, 문자 메시지는 영원을 향해 뻗어나가고, 그들은 하염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다.
세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초속 5센티미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첫 번째 에피소드 <벚꽃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동창인 토노 다카키와 시노하라 아카리는, 아카리가 도치기로 전학을 가서 멀리 떨어지게 된다. 편지를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었지만, 중학교에 들어간 토노가 다시 먼 시고쿠로 전학을 가게 된다. 전철로는 만날 수 없는 거리에 살게 된 두 사람은, 그 전에 한 번 만나기로 한다. 혼자서는 신주쿠역에도 가 본 적이 없었던 다카키지만, 열차를 바꿔 타는 역과 시간을 빽빽이 적은 종이를 들고 아카리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그날따라 폭설이 내리고, 기차의 연착이 거듭되면서 아카리와 만나기로 한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린다. 중도에 멈춰버린 기차, 서로 기차와 역에 있어 전화연락조차 할 수 없는 답답함, 그럴수록 절절이 끓어오르는 그리움. 결국 다른 교통편이 모두 끊겨버린 한밤중에야 그들은 만나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만나는 것은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다. <벚꽃 이야기>의 진수는, 그들이 폭설을 뚫고 서로에게 가고, 기다리는 모습이다.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면서, 어떻게든 상대에게 다가가기 위해 혼신을 다한다. 무언가와 싸운다거나, 험준한 산길을 헤매는 건 아니다. 단지 그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릴 뿐이다. 연착된 기차를 기다리고, 멈춘 기차가 다시 달리기를 기다리는 것. 그들은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꾼다거나 할 힘은 없다. 그럴 생각도 없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닥친 어려운 상황을 견디어내면서 서로에게 다가갈 뿐이다. 그게 세상이고, 그게 인생이다. <별의 목소리>에서는 광활한 우주가 사이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목소리가 서로에게 들리지 않지만, 보통의 일상에서도 그런 경우는 다반사다. 결국 <벚꽃 이야기>에서 그들은 만나지만, 두 번째 에피소드인 <코스모나우토>를 보면 다시 연락은 끊어지고 두 사람은 그저 그리워할 뿐이다.
<초속 5센티미터>는 애절하고, 아주 진한 감정을 전해준다. 하지만 신카이 마코토는 능숙한 이야기꾼은 결코 아니다. 신카이 마코토는 소설가가 아니라, 시인에 더욱 가깝다. 그런 점에서 <초속 5센티미터>의 옴니버스 구성은 신카이 마코토에게 가장 적합한 형식이다. 기승전결이 명확하고, 긴 호흡으로 이끌어가야 하는 장편 애니메이션은 그다지 적합하지 않다. 거의 혼자 작업했던 <별의 목소리>의 성공으로 가능했던 장편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는 아쉬운 범작이었다. 여전히 신카이 마코토의 진심은 전해지고 아찔하도록 아름다운 순간들이 존재하지만, 계속 보고 있기에는 답답하고 또 지루했다.
또한 신카이 마코토는 어떤 순간에 집착한다. 그 순간은, 추상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인 어떤 리얼리티다. 신카이 마코토는 현실의 풍경을 거의 극사실주의에 가깝도록 그려내면서도, 단지 물질성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 ‘리얼리티’에서 스쳐가거나 잠시 안주하는 감정과 정서를 예리하게 잡아낸다. 현실의 리얼리티를 통해서, 역설적으로 우리가 잃어버린 영원성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에서 대규모 작업방식이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개인적 작업방식으로 돌아간(그렇다고 완전히 혼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신카이 마코토는 <별의 목소리>의 감동을 재현하는 <초속 5센티미터>로 돌아왔다. 작업환경을 바꾸고, 다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단편을 이어붙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낸 <초속 5센티미터>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단지 시스템만이 아니라 개인의 상상력으로도 뒷받침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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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초속 5센티미터를 보았습니다.
Tracked from 지극히도 사적이며 소박한 2007/09/30 20:51 삭제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감독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인 '초속 5센티미터'를 보았습니다. 항상 타카키가 전철을 타고 가는 부분까지만 보다 말았는데, 그 부분을 다시 보게 되었네요. 전철이 강설에 계속 정차하고 지연되는 모습에 저마저도 지쳐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몰라도 주인공인 타카키와 아카리가 재회하는 장면이 오래 남네요. 그리고 서둘러 헤어진 그 둘의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그 둘이 성인이 되었을 때까지의 이야기로 이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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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초속 5센치미터 - 너무 섬세한 심리묘사, 너무 정교한 배경, 성장에 대한 이야기
Tracked from 형준의 감상기 2007/09/30 21:44 삭제첫 사랑을 잊지못하는 남자 토오노 타카키. 지난 첫사랑은 추억으로 묻고 새로운 사랑을 하는 여자 스미타 카나에. 이 둘의 사랑과 이별, 그 뒤의 상황(이야기가)이 총 3화로 꾸며진다. 총 3화가 유기적으로, 시간적으로 잘 이어가고, 맺어진다. 각자 독립된 스토리와 결말이지만, 시간순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지구의 중력을 뚫기 위해 초속11km로 나아가는 우주선. 시속 100km의 속도로 움직이는 전차. 초속 5cm의 속도로 떨어지는 벚꽃의 낙하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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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오늘에서야 보았는데, 살짝 트랙백 걸어봅니다^^
소설가가 아니라 시인 이라는 표현.
정말 와 닿는 말이네요.
그림은 극사실주의로 그렸지만, 대사보다는 행동 하나 몸짓 하나로 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걸 표현한 감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