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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입 (3)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을 때는 새벽이었다.

탁상시계의 야광 바늘은 3시 28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집안은 고요했다. 공복감과 허기와 갈증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주방으로 나가 냉장고를 열었다. 꿈에서처럼 갖은 음식들은 아니었지만, 식욕을 자극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그것들을 꺼내어 식탁 위에 차렸다. 몽땅 꺼내놓고 나니, 식탁이 가득 찼다. 입안에 군침이 솟구치고 참을 수 없는 식욕이 치밀었다. 저것들을 먹어치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못 배길 것만 같았다. 나는 식탁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선 자세로 슬라이스 치즈부터 포장을 벗겼다. 손이 떨려서 잘 비닐 포장 벗기기가 어려웠다. 겨우 비닐 포장을 벗기자마자, 나는 치즈를 통째로 입에 밀어 넣었다. 달콤함과 행복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남은 치킨 조각, 총각김치와 날 어묵, 콩자반과 밥, 사과와 포도, 미숫가루와 참치 캔에 이르기까지 나의 입은 꾸역꾸역 식탁 위에 올려진 음식들을 순서도 없이 집어 삼켰다. 식탁 위의 모든 음식을 먹어치웠을 때에야 배가 터질 듯한 포만감이 찾아왔다. 행복했다. 다이어트든, 비계든 상관없었다. 일주일 만에 음식을 실컷 먹어치운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었다.

잠시 후 나는 속 울렁거림과 함께 갑작스런 욕지기를 느꼈다. 그리고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변기 속에 먹은 모든 걸 토하고 말았다.

“꿰에에엑…….”

내 입은 내가 듣기에도 역겨운 소리를 냈다. 어릴 적 그런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느 일요일 오후였다. 소리는 옆집에서 들려왔다. 호기심에 그 집 대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뭔가를 빙 둘러싸고 서 있었다. 소리는 가까이 갈수록 더 요란해졌다. 마침내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을 때 거기에는 집돼지 한 마리가 누워 있었다. 멱을 딴 상처가 입처럼 벌려져 있었다. 그 상처로 검붉은 피와 역겨운 비명 소리가 뒤엉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멱따는 소리를 내며 나는 허겁지겁 먹어댔던 모든 걸 토해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눈물을 찔끔거리다 거울을 보니, 거기에는 정말 돼지 같은 입을 가진 역겨운 얼굴이 있었다. 입 주변에는 음식 찌꺼기인지, 토사물 찌꺼기인지 구별할 수 없는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나 자신에 대한 혐오와 치욕으로 나는 몸을 떨었다.

악몽 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며칠간의 피 말리는 다이어트와 한밤중의 폭식, 그리고 구토. 다이어트, 폭식, 구토, 다이어트, 폭식, 구토……. 뫼비우스의 띠처럼 그것들은 반복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생산적인 일이라고는 오로지 폭식 후 소화되다 만 토사물을 입 밖으로 생산해내는 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생산적인 일도 하지 못했다. 다이어트를 하는 중에는 온몸에 힘이 빠져 움직이고 싶지도 않았고,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리고 폭식과 구토를 다음날이면 속 쓰림과 자책으로 자학(自虐)하며 하루를 보냈다. 단 한 줄의 시나리오도 쓰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식욕은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식욕이란 게 형체가 있다면 그걸 꺼내 발기발기 물어뜯고 찢어발기고 싶었다. 다이어트 하는 동안 식욕은 풍선처럼 끊임없이 부풀어 올랐고 고작 사나흘이면 끝내 나는 그 식욕에 굴복하고 말았다.

폭식과 구토가 유난히 지독했던 밤을 보낸 이튿날 오전이었다.

도저히 속 쓰림을 참기 어려웠다. 룸메이트가 있었다면 위장약이라도 사다 달라고 부탁했을 것을 그날따라 룸메이트도 외박 후 귀가하지 않은 상태였다. 전날 데이트가 있다면서 밖에 나가서는 친구 집에서 자고 들어온다는 것이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맥없는 몸을 이끌고 비실비실 밖으로 나왔다. 그나마 아파트 앞 약국은 셔터가 내려가 있었다. 포기하고 아파트로 돌아갈까, 아니면 한 500미터 걸어가야 나오는 대형 약국까지 갈까, 망설이다 속 쓰림을 참기 힘들어 약국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길가에 늘어선 벚꽃나무에서 꽃잎들이 물고기 비늘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내 위장은 그 향기에도 자극받아 위산을 분비했다. 나는 인상을 쓰며 배를 움켜쥐었다. 지름길을 택해 후미진 골목을 걷던 나는 대학가 주변에 즐비한 여관 촌에 들어섰다. 그리고 남자와 함께 여관에서 나오는 룸메이트를 보았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룸메이트와 팔짱을 끼고 있는 남자는 바로 그였다. 한동안의 혼란 끝에야 나는 애초에 그의 관심이 내가 아닌, 룸메이트에 있었다는 걸 알았고, 그가 나에게 했던 그 어이없는 행동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갑자기 위장이 아닌, 오른쪽 빗장뼈 아래에 격심한 통증이 일었다. 몸속에서 뭔가 꿈틀대며 튀어나오려는 듯한 느낌이었다. 눈물 나게 아팠다.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니가 방금 우릴 꼬나봤냐?”

멀찌감치 중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자애를 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패거리들이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었다. 돈이라도 뜯는 모양이었다.

“주둥이에 좆 박아놨냐? 꼬나봤냐구 이 씨발놈아.”

가슴팍을 밀치는 소리. 통증이 더 심해져서 나는 그 부위를 움켜쥐고 나지막이 신음했다.

“눈깔을 확 도려내 벌라. 누굴 꼬나봐. 안 그래도 졸라 야마 도는데…….”

가서 도와주어야 할까. 욕지거리는 내뱉는 본새가 금방이라도 몰매를 퍼부을 것만 같은 기세였다. 하지만 통증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었다.

“어? 이 씹새끼가 또 야리네?”

예상했던 대로 패거리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이 남자애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족속들. 이 세상의 수컷들이 지긋지긋했다. 그 치졸한 정복의식과 서열주의, 우등한 암컷을 차지하려는 번식본능과 세력권을 빙자한 폭력성이 역겨웠다. 할 수만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저것들에게 달려가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자리에 주저앉아 고통에 신음하며 사태를 관망하는 것뿐이었다. 몰매를 견디다 못한 남자애가 땅바닥에 허물어지던 순간 한 녀석이 그 애의 뒤통수를 발꿈치를 내리찍었다. 그 순간 남자애가 비명을 질렀다. 패거리 중 하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외쳤다.

“씨발, 뭐야? 이 새끼 눈깔 빠졌어!”

거리가 멀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황으로 미루어볼 때 남자애의 눈이 밖으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내 눈! 내 누운!”

사내애가 눈두덩을 움켜쥐고 길바닥에 나뒹굴며 비명을 질렀고, 놀란 패거리들은 주춤거리다 줄행랑을 놓았다. 패거리들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홱홱 스쳐지나갔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나타났는지, 쓰러져 뒹구는 남자애의 주위로 행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고 개중에는 휴대전화로 신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 즈음에야 통증은 가라앉았다. 식은땀이 맺힌 이마가 서늘했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다 쓰러져 뒹구는 남자애를 돌아보았다. 만일 내가 끼어들었다면 저 애가 눈알이 빠지는 사고를 면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저 애의 눈알이 빠진 것도, 룸메이트가 그와 밤을 보낸 것도, 그가 나를 모욕하고 차버린 것도, 내가 남자라는 족속에 믿음을 잃어버린 것도 모두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사건 현장 주변을 빠져나왔다. 다시금 식욕이 일었다. 걷잡을 수 없는 식욕이었다. 도로변에서 어묵을 팔고 있는 노점상으로 다가가 어묵을 집어 들고 미친 듯이 집어삼켰다.

“처녀, 천천히 먹어. 체하겄네.”

노점상 주인 노파가 딱하다는 듯 말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온 신경이 입으로 쏠려 있었다. 맛있었다. 어묵이 너무 뜨거워 입천장이 벗겨지며 생긴 허물이 입 속에서 어묵과 함께 뒤섞이는 게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솔직히 허물도 맛있었다.

아파트로 돌아온 나는 또다시 구토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양이었다. 구토가 멈추었을 때는 속의 내장까지 완전히 밖으로 쏟아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하며 소파에 앉아 있는데 룸메이트가 돌아왔다.

“언니, 이거 줌 먹어봐. 약사가 그러는데, 다이어트 땜에 영양 부족할 땐 이게 최고래.”

룸메이트가 내려놓은 것은 '화이버넷'이라는 건강보조식품이었다. 캡슐이 든 플라스틱 통 표면에는 전혀 운동을 안 해도 무방할 금발의 날씬한 미녀가 아령을 들고 있는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그 통을 집어 들고 뚜껑을 개봉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던 캡슐들을 몽땅 입안에 털어놓고 우걱우걱 씹기 시작했다.

“언니! 왜 이래? 진짜 미쳤어?”

룸메이트가 나를 뜯어말리며 소리쳤다. 나는 그녀를 거세게 밀어냈다. 룸메이트가 뒤로 벌렁 넘어지며 탁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쳤다. 룸메이트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나는 가까스로 캡슐들을 몽땅 집어삼키고는 룸메이트에게 소리쳤다.

“그래, 나 미친 거 이제 알았어? 나 미쳤어! 미쳤으니, 너랑 어제 여관서 붙어먹은 그 새낄 좋아했지. 미치지 않고서야 나 같은 돼지는 비곗덩어리로 취급하는 그런 새끼, 내가 남자 경험 있는지 없는지 친구새끼랑 내기나 하면서 갖구 노는 그런 새낄 좋아했겠니?”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이 터진 봇물처럼 흘러나왔다. 또다시 빗장뼈 아래의 통증이 욕지기와 함께 치밀었다. 나는 욕실로 달려가 집어삼킨 모든 걸 변기 속에 토해냈다. 고개를 들어 세면대 앞의 거울을 보았을 때 거기에는 여전히 역겨운 몰골의 추물이 서 있었다. 저 입. 끊임없이 먹는 걸 처넣고 우물거려야 직성이 풀리는 저 주둥이. 저걸 없애버리고 싶었다.

“언니! 문 열어!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문 줌 열구 얘기 줌 해! 나한테까지 정말 이럴 꺼야?”

룸메이트가 욕실 문을 두들겼다. 나는 왈칵 욕실 문을 열었다.

“언니, 정말 오해야, 나 그 사람 만난 적 없어. 어제 남자랑 여관 갔던 건 맞아. 맞는데, 진짜 그 사람은 아니었어. 정말 하늘에 맹세코……”
“너 진짜 사람 비참하게 할래? 정말 죽고 싶게 할래?”

룸메이트가 흠칫하는 얼굴로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나가! 여기 내 아파트야. 너 원래 지난 학기까지만 있기로 한 거 아니었어?”

그녀는 내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몇 번 들썩이더니, 말없이 제 방으로 걸어가 방문을 열어젖히고, 장롱 위에서 여행 가방을 내려 옷가지를 쑤셔 담았다.

“나머지 살림들은 며칠 있다 가져갈게. 됐지? 지난 학기까지만 있기루 했던 거 내가 깜박 잊구 있었네? 알려줘서 정말 고마워.”

룸메이트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차가운 목소리였다.

“참, 가기 전에 하나 알려줄까? 언니가 좋아했다던 그 미친 새끼. 그 새끼가 그러더라. 언니랑 모텔 간 게 지금까지도 악몽이래. 언니 알몸만 생각하면 지금도 그게 섰다가도 줄어서 안 슨대.”

그리고 아파트 문이 거세게 닫혔다.

한 동안 나는 욕실 문턱 앞에 멍 하니 서 있었다. 목이 근질거려 만져보니, 피였다. 꽉 다문 입술에서, 앞니에 꽉 짓눌린 입술이 터져 나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 입. 저 주둥아리. 저걸 없애야 한다는 생각만이 새하얘진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서랍을 뒤졌다. 맨 밑 잡동사니를 넣어두는 서랍에서 반짇고리가 나왔다. 나는 거기서 흰 실이 귀에 끼워져 있는 바늘을 집어 들고는 다시 욕실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욕실 거울 앞에 다시 선 나는 바늘로 입술을 꿰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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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입 (4)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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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이자정)


Posted by Jong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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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얀고래 2007/10/16 00:12

    이거 다음편은 연재 안 하시나요? ㅜㅜ

  2. 구독자 2008/03/23 15:37

    오, 눈하고 입하고 연관되네요.

  3. 이거 진짜진짜진짜 재밌다........흥미진진하네 진짜......'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