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링>은 비교적 단순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고전적인 동양적 원혼 이야기를 현대 전자 매체와 결합한 것이지요. 사실 이것도 아주 새로운 아이디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도시전설(일본에서는 '현대전설'이라는 단어로 굳어지는 모양입니다만)에서 이런 식의 시도를 하고 있으니까요. 아니, 시도라는 말도 여기서는 어울리지 않죠. 그냥 자생한다고 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아무리 최첨단 기계들과 콘크리트 건물들로 구성된 현대 세계를 산다고 해도 옛 믿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링>에서 그 현대 전자 매체는 저주받은 비디오입니다. 마치 베리만의 <페르소나> 도입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연결된 비디오를 보면 정체불명의 전화가 걸려오고 그 비디오를 본 사람은 꼭 일주일 뒤에 죽습니다. 영화는 조카의 죽음을 캐다가 재수없게도 그 비디오를 보게 된 방송기자 아사가와 레이코가 전남편인 다카야마 류지와 함께 사건의 비밀을 캐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끝에 가서 모든 진상이 밝혀지면 원래 도입부에 사용되었던 '현대전설'은 새로운 결말을 추가해 업그레이드됩니다.
영화는 일본식으로 정갈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영화에는 잔인한 장면도 없고 무서운 장면들도 아주 제한적으로만 사용됩니다. 어떻게 보면 이 정갈함은 공허함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이 흔해빠진 오컬트 탐정물의 스토리를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시키는 것은 저주받은 비디오라는 아이디어와 유명한 몇몇 비주얼에 불과하니까요. 하긴 화살을 멀리 날려보내려면 시위가 가늘어야한다고들 하죠. 그만큼 영화가 아이디어를 믿었다는 증거일 겁니다.
나가타 히데오는 영화에 여성적인 감수성을 더해 원작과 차별화시킵니다. 주인공이 여자로 성전환되고 모성애의 감정이 강조된 것이 대표적인 예죠. 원작과는 달리, 영화는 무서움보다는 일종의 애조띤 느낌을 더 강조하는 듯 합니다. 저보고 말하라면 그런 차별화가 영화를 더 풍요롭게 했다고 하겠습니다. 결말이 다 알려지고 사다코가 텔레비전에서 기어나오는 유명한 장면이 끝도 없이 패러디되는 요새 이 영화를 보면서 대단한 공포감을 느끼기는 어려우니까요. 공포말고 다른 어떤 게 있으면 더 좋죠.
공포감이 세월과 함께 떨어져 나간 지금 와서 봐도, 영화의 효과는 여전히 좋은 편입니다. 영화에서 아주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사다코의 머리칼과 모성애의 주제는 나가타 히데오/스즈키 코지의 차기작인 <검은 물 밑에서...>에서 재활용되기도 하죠. 동의하는 분들은 많지 않겠지만, 전 나중 영화가 더 솔직하고 효과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링>을 끌어가는 드라마는 조금 기계적인 느낌을 주거든요.
<링>은 잘 만든 호러 영화지만 걸작의 위치에 도달하기엔 지나치게 안전한 영화처럼 느껴집니다. 아이디어는 인상적인 편이지만 노골적인 작위성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도 하고요. 기본 아이디어가 출판물이나 영화 매체보다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몰래 돌아다니는 도시 전설에 잘 맞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03/01/21)
기타등등
영화와 원작 소설은 계속 스케일을 넓혀가며 속편들을 만들어냈는데, 지금와서 보면 원작의 단아한 힘을 많이 망쳐놓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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