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 나이트 샤말란의 <레이디 인 더 워터>는 슬럼프에 빠진 작가의 작품입니다. 자신도 그걸 알고 있고 그 때문에 어느 정도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게 눈에 보여요. 아니, 그냥 보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 작가가 관객들을 향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있지요. "나는 슬럼프에 빠졌다! 미치겠다!"
증거 하나. 이 영화의 기본 설정을 마련해주는 건 한국인 캐릭터인 영순이 엄마가 들려주는 '동양의 민담'이죠. 하지만 정작 그 이야기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절대로 나올 수 없는 내용입니다. 심지어 고유명사도 괴상해요. 나프나 스크린트와 같은 것들이 한국 동화에서 유래될 수 있는 이름들입니까? 그건 한국 문화에 대해 몰라도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거죠.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이 설정들은 어느 민담과도 맞지 않습니다. 그러기엔 너무 복잡해요. 이건 뉴 에이지 독자들을 노린 기성품 현대 신화나 판타지 소설 또는 게임 설정집에 더 가깝습니다. 역시 너무나도 자명한 거죠. 그런데도 샤말란은 여기에 더 그럴싸한 설정을 붙이는 대신 그냥 동양의 동화라고 우깁니다. 이게 "자.포.자.기!"라고 외치는 게 아니면 뭡니까?
증거 둘. 샤말란 자신의 캐릭터를 보시죠. 이 영화에서 샤말란의 캐릭터는 슬럼프에 빠진 작가입니다. 그런데 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가 연기한 물의 요정은 그에게 영감을 주러 물 속에서 온 거랍니다. 그가 쓴 책은 미래의 미국 지도자가 될 소년에게 영감을 주어 세상이 바뀐다고 하는군요. 하하하. 그는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고 자기 확신이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 겁니다.
증거 셋. 이 영화에는 영화 평론가 캐릭터가 하나 나옵니다. 영리하고 거만하고 세상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그의 지식은 영화 세계의 얄팍한 관습에 한정되어 있고 세상 일에는 전혀 쓸모가 없죠. 모든 사람들이 다 존중받는 이 영화에서 그는 홀로 바보 취급 받으며 처벌당합니다. 아, 그래요. 샤말란은 <빌리지>를 혹평한 평론가들을 용서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이전 필모그래피를 검토해보세요. 이런 사람이 나오는지.
이런 식으로 끝도 없이 나갑니다. <레이디 인 더 워터>가 실패한 영화라면, 그건 샤말란이 나쁜 재료로 나쁜 이야기를 만들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이 영화의 재료는 샤말란의 좋은 영화들과 특별히 다를 게 없어요. 필라델피아 교외 중산층의 지루한 일상과 신비주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만나고, 상처입은 작은 사람들이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심각한 멜로드라마와 무덤덤한 코미디가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마주치는 샤말란 특유의 세계는 <레이디 인 더 워터>에도 존재합니다. 언제나처럼 배우들의 질도 훌륭하고요. 문제는 그가 슬럼프와 비평가들의 비난 때문에 평정심을 잃었다는 겁니다. 이건 샤말란처럼 시치미 뚝 뗀 담담한 장르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겐 치명적이죠. 영화는 그냥 전체적으로 계산이 어긋나 있고 그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지고 지루합니다.
앞으로 샤말란이 어떤 행보를 걸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에 갇힌 사람이거든요. 지금 와서 다른 스타일의 영화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잃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비평가들을 증오하기 시작하는 이 단계에선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새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 이외엔 다른 대책이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06/10/10)
기타등등
국내판에서는 영순과 영순 엄마의 대사를 한국 성우가 더빙했더군요. 하지만 영순의 마지막 한국어 대사는 그냥 남아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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