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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드 전기>의 원작은 어슐러 K. 르 귄의 <어스시> 시리즈입니다. 그렇다고 아주 충실하게 옮긴 작품은 아니에요. 기본적으로 <머나먼 바닷가>와 <테하누>를 기본으로 삼고 그 위에 <어스시의 마법사>와 <아투안의 지하무덤>을 조금씩 첨가했죠. 그렇다고 이들을 연대기 순으로 길게 엮었느냐... 그것도 아니에요. 네 권의 책이 하나로 묶이면서 원작의 이야기들은 심하게 변형되었습니다.

영화의 도입부는 <머나먼 바닷가>처럼 보입니다. 어스시의 마법사들이 마술을 잃어가고 사람들은 대책을 의논하지요. 그런데 엉뚱하게도 영화가 시작되자 마자 왕이 암살당합니다. 암살자는 바로 <머나먼 바닷가>의 주인공 아렌 왕자이고요. 이 친구가 왜 이러냐고요? 그건 이 영화의 아렌 왕자는 <머나먼 바닷가>의 아렌 왕자가 아니라 <어스시의 마법사>에 나오는 젊은 게드의 변형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게드 대신 자신의 그림자에게 쫓겨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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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는 영화 초반에 대현자 게드를 만나긴 합니다. 하지만 어스시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지는 않지요. 이 영화의 게드는 아렌 왕자를 만나기 전에 그 짓을 이미 한 번 했습니다. 대신 이 둘은 <아투안의 지하무덤>에서 게드와 함께 탈출한 전직 무녀 테나르의 집에 얹혀 지내지요. 테나르는 테루라는 소녀를 딸 대신 키우고 있는데, <테하누>를 읽으신 분이라면 이 아이의 정체가 무엇인지 아실 겁니다. 나쁜 마법사도 나오냐고요? 네. <머나먼 바닷가>와 <테하누>의 악당들을 하나로 묶은 사악한 마법사가 나오죠. 아렌과 테루가 이와 맞서 싸우는 장면도 나오고요.

혼란스럽죠? 원작에 익숙한 독자들이라면 더 혼란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전 이런 식의 개작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어슐러 르 귄의 소설을 각색해 대중성 있는 영화로 만드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말이 많고 플롯은 흐릿하고 호흡은 느리잖아요. 온전한 <어스시> 각색물이 나오지 못할 거라면 이들을 하나로 묶어서 보다 짜임새 있고 박진감 있는 새 시나리오를 쓰는 것도 나쁠 건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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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가 구현한 어스시의 세계가 어슐러 르 귄의 독자들의 맘에 들지 않을 가능성도 큽니다. 특히 게드와 테루의 묘사가 집중포화를 받을 가능성이 크군요. 원작에서 게드는 흑인이고 테루의 화상은 영화에서 그린 것보다 훨씬 심각하니까요. 전 테루가 처음 등장했을 때 화상자국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답니다. 그냥 그림자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심하게 화상을 입은 소녀를 2시간 동안 바라보는 건 힘든 일이고, 아주 아주 아주 자세히 보면 게드도 피부색이 약간 어둡긴 하답니다.
 

영화의 진짜 문제는 이런 기초적인 설정과 방향이 아닙니다. 그것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는 것이죠. 기존의 지브리 영화들과 비교해 보면, <게드 전기>는 서툴고 거칠거칠합니다.

가장 치명적인 건 각본이에요. 네, 네 편의 소설들을 무작정 하나로 묶었으니 덜컹거리는 건 당연합니다. 하지만 원작과 감독의 비전이 교통사고처럼 충돌했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덜컹거려도 재미있었습니다. <게드 전기>는 그냥 재미가 없어요. 영화는 늘어지고 따분합니다. 르 귄의 소설도 그렇지 않느냐고요? 네... 그렇긴 해요. 하지만 원작은 좀 느리긴 해도 그 느림은 이유가 있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그런 것처럼 미완성이라는 느낌은 주지 않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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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도 그냥 그렇습니다. 기본적인 지브리의 느낌은 있어요. 하지만 전체적인 색조는 탁하고, 배경그림은 종종 감상에 방해가 될 정도로 질이 떨어지며, 결정적으로 아이디어가 부족합니다. 아무리 지브리식으로 하늘을 날아도 이전의 맛이 나지 않는군요.

누구를 비난해야 할까요? 이 영화의 원안엔 미야자키 하야오도 참여했습니다. 아무리 감독이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지브리 자체의 시스템이 눈먼 장님처럼 감독을 따라갔던 것도 아닐 거고요. 처음부터 르 귄의 소설들이 그렇게까지 애니메이션에 잘 어울리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죠.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건, 관객들이나 평론가들이 그 책임을 미야자키 고로에게 돌릴 거라는 거죠. (06/08/02)

기타등등

자막에서는 게드의 이름인 새매 Sparrowhawk를 그냥 하이타카라고 옮기고 있더군요. 악당 마법사 이름을 거미라고 옮겼으니 새매라고 번역하는 게 옳은데.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거미라는 이름도 조금 걸려요. 테나르의 이름인 고하도 거미라는 뜻이잖아요.

Posted by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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