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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머스 해리스의 한니발 렉터 시리즈는 <한니발>로 일단 마무리지어졌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로서는 이런 마무리가 조금 거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안소니 홉킨즈를 주연으로 해서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을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레드 드래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마이클 만이 오래 전에 <맨헌터>라는 제목으로 흥미진진한 영화 버전을 만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한니발 렉터 삼부작 중 하나로 여기고 나란히 보관하자니... 아무래도 짝이 맞지 않습니다. 안소니 홉킨즈가 안나오는 한니발 렉터 영화라니요.

해결책은? 안소니 홉킨즈를 렉터로 내세운 <레드 드래곤> 영화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브라이언 콕스가 렉터로 나온 <맨헌터>보다 렉터의 비중이 더 커야겠지요?

그 결과 <레드 드래곤>은 제작 기획단계부터 이상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토머스 해리스의 시리즈에서 <레드 드래곤>은 독립적인 소설이었고 <양들의 침묵>은 그 속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영화 <레드 드래곤>은 <양들의 침묵>과 <한니발>의 프리퀄이었습니다. 조금씩 순서대로 캐릭터를 쌓아가던 소설 시리즈와는 달리 영화 <레드 드래곤>은 이미 나온 영화들한테서 오히려 영향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환은 꽤 흥미로운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가지는 분명했어요. <레드 드래곤>은 시작부터 움직일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영화였습니다.

브래트 라트너라는 감독 선택도 미심쩍었습니다. 그는 <러시 아워> 시리즈와 같은 히트 영화를 낸 적 있지만 분명 리들리 스코트나 조나단 드미와 같은 등급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에 맞먹을만한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결과는? <레드 드래곤>은 지금까지 나온 한니발 렉터 영화들 중 가장 개성이 부족한 작품이 되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맨헌터>와 같은 쿨한 하드보일드의 느낌도 없고, <양들의 침묵>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음산한 모던 고딕의 느낌도 없으며, 나태한 스타일리스트가 뒤탈에 신경쓰지 않고 마구 휘둘러대는 듯 했던 <한니발>의 자유로움도 없습니다. 영화는 그냥 모범적으로 토머스 해리스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양들의 침묵>을 통해서 본 <레드 드래곤>이죠. 어쩔 수 없는 빈칸 채우기 영화니까요. 영화는 <맨헌터>와 <양들의 침묵>에서 스타일과 개성을 조금씩 빌려 온 것 같은 느낌을 풍기는데, 감독의 의도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영화에서 스탭들을 끌어왔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맨헌터>의 촬영감독이었던 단테 스피노티와 <양들의 침묵>의 작가 테드 텔리, 프로덕션 디자이너 크리스티 지아가 모두 참여한 영화니까요.

<맨헌터>와의 차이점은 어떨까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한니발 렉터의 비중입니다. <맨헌터>에서 한니발 렉터는 비교적 작은 역이었습니다. 음산하고 불길한 플롯 도구였죠. 하지만 <레드 드래곤>에서 렉터는 비중이 더 커졌습니다. 여전히 이야기는 '이빨 요정' 사냥이지만, 영화는 이 이야기가 완결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이런 식이죠. "이건 전주일 뿐이야. 앞으로 렉터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가 더 남았어." 상관없습니다. 그렇다고 크게 구성을 해치지는 않았으니까요.

캐스팅도 더 세졌습니다. 안소니 홉킨즈, 에드워드 노튼, 레이프 파인즈, 에밀리 왓슨, 메리-루이즈 파커, 하비 케이틀... 그러나 이들이 <맨헌터> 때보다 더 좋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들 잘한 편이지만, 호화 캐스팅의 가장 큰 역할은 이 영화를 더 주류 영화처럼 보이게 했다는 것이거든요. 전체적으로 이 캐스팅은 굉장히 안전하게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안전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어요.

전체적으로 <레드 드래곤>은 잘 만든 영화입니다. 브래트 라트너의 공로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는 조나단 드미나 리들리 스코트처럼 렉터 시리즈에 특별히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지 못했지만, 연쇄살인마를 소재로 삼은 효과적인 스릴러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한 듯 해요.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네 번째 영화라는 걸 생각해보면 말이죠. (02/11/15)

기타등등

영화에 나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그림 <The Great Red Dragon and the Woman Clothed with the Sun>을 보고 싶은 분들은 다음 링크를 클릭하세요.

Posted by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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